이제 마흔이 넘은 선영은 청소년기에 사고로 중증 지체 장애를 얻었다. 가족은 그의 수술비 마련을 위해 집을 팔고 이사했다. 이후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쓰러져 요양원에 있고, 어머니의 건강도 점차 악화되었다. 형은 군대에서의 일로 정신질환을 얻었다. 기초수급자로 사는 선영은 가족의 생활을 위해 9년 정도 법원행정고시와 로스쿨 입시를 준비했지만 번번이 낙방했다. 그전에는 삶의 무게에 눌려 10여 년간 게임만 하며 시간을 보냈다. 도대체 이 모든 일을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기는 한 걸까? 나는 감히 선영이 삶에 느끼는 무게를 ‘안다’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묘한 것은 이 영화가 우울하지도, 숨도 못 쉬게 불행과 불운을 몰아붙이듯 전시하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영화의 분위기는 반대다. 심지어 경쾌한 느낌이다. 선영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어보겠다는 감독 친구에게 ‘내 삶이 이미 무거우니까 영화가 재밌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감독은 비관에 함몰되지도, 섣불리 낙관을 전망하지도 않으며 이 미묘한 경계 위에서 선영이 질주하게끔 연출해 그의 뜻에 성공적으로 부응한다. 선영은 전동 휠체어를 탄다. 하지만 그렇기에 장애를 가진 몸으로도 달릴 수 있다. 이 역설적이면서도 생산적인 긴장은 선영의 삶에서 근본적인 조건을 이루는 듯 보이는데, 이는 그가 남들과는 전혀 다른 삶의 지평 위에서 자신만의 삶 전망을 벼려내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구체적 내용을 면밀히 가늠할 수는 없지만, 나는 이 점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의 압도적으로 불리한 처지를 분명히 인지하면서도 어느 한쪽에 잠식당하지 않고 낙관과 비관의 비율을 적당히 유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선영의 이야기와 삶의 태도가 갖는 은은한 힘의 비밀은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영화가 선영이 이미 그 상태에 도달한 이후에 촬영되어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어떤 시간을 보내 지금에 다다랐는지에 관한 이야기 역시 대단히 근사할 것만 같다. 9년간 삶을 즐기며 ‘널널하게’ 시험 준비를 하면서도 가족의 물질적 안녕을 위한 토대를 살뜰히 다지는 그의 생활력과 결단은 정말이지 경탄을 자아내게 하는 지점이 있다. 나는 앞으로 소수자성과 그로 인한 비극에 함몰되지 않는 이야기에 관한 가장 근사한 참조점으로 이 영화를 기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