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 덕산에 가면서 보았던 풍경은 잊혀지지 않는다. 물속에 고개를 푹 처박고 자맥질을 하는 공룡처럼 보이던 산들과 언제 흐트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나뭇잎들이 서걱거리는 길을 매번 지나칠 때마다 오늘도 무사히 내 몫을 해내야지 다짐했다. 그러나 나는 이 친구들을 제대로 촬영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문이 몇 달간 강력하게 들었었다. 고함을 지르며 친구들과 의미없는 몸싸움을 하는 남자아이들과 낯선 사람에 대한 경계의 눈초리를 쏘아보내는 여자아이들, 유일하게 나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며 틱톡 동영상을 같이 찍자고 다가온 소하까지 도무지 여기서 어떻게 영화를 만들 수 있을지 막막하기만 했다. 대체 벌에도 그림자가 있냐고 물어봤던 철학적인 고민과 낭만은 어디에 가고 매번 수족구를 하면서 싸우고 울고 토라지는 애들만 남아있는거지 하고 한 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그런 원초적인 아이들의 모습을 내가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것 자체가 나는 이미 망각이 진행된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였을 뿐이었다. 영화를 보면 누군가는 자신의 숨기고 싶었던 과거를 생각해야만 할 것이다. 자신의 봉인된 시간 속에 어렸던 ‘나’를 보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다. 내가 이 아이들을 지켜보면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짝꿍이 그어논 선을 넘고 싶어하고, 왜 나는 한 대를 쳤는데 넌 두 대를 때리냐며 화를 내기도 한다. 아니, 내는게 정상이다. 이 세상은 그 모습이 지금은 아주 세련되고 정교해져서 교양있는 척하는 아이어른들의 세상일 뿐이다.
여기 이곳 덕산에서는 그런 인간의 원형이 모조리 정직하게 발가벗겨진다. 아이들은 선생님이 삐지니까 체벌이라는 제안에 응해준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도 하고, 선생님은 우리의 마음을 알아주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는 더 뭉치고 엇나가려한다. 악을 대항한 선만이 뭉칠 수 있고,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아직은 성장이 덜 된 미약한 나라는 존재가 가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6학년이자 13살인 여자아이들에게 이 교실세상은 모순 그 자체이고, 콧물도 제대로 못 닦는 초딩같은 남자아이들이 시끄럽게 구는 공간 안에서 아이돌그룹 남성의 이미지에 호기심 가지기 시작하는 그들만의 교실이기도 하다. 이 소녀들에게 어른들은 입학부터 졸업까지 6년을 함께해야하는 특수한 환경을 자꾸만 망각하고 과거를 잊으라는 황당한 조언을 준다. 아이들은 그런 교사어른에게 날카로운 일침을 가하기도 하면서, 동네 어른들에게 깍듯하게, 선배언니들과 후배동생들에게 천사같은 미소를 보내는 말괄량이들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이미 자신의 세계는 완연하며, 너무 어린 남자아이들과 서울에서 굳이 여기까지 와서 자기들을 찍겠다는 과거의 선생님에 대한 연민과 냉소가 공존한다.
동민이는 첫 날 나에게 다가와서 손을 대보라고 했다. 손을 내밀자 시원한 손소독제를 뿌려주었다. 소하는 지난주에 자신이 하다가 덜 한 이야기를 2주가 지나서 온 나에게 그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지난 주에 덜 본 드라마가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제하는 그렇게 나에게 온 소하를 갑자기 번쩍 들어올려서 함께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그러면 내 머리에는 물음표가 100개정도 생기는 기분이었다. 내가 방금 무슨 이야기를 듣고 어떤 행동을 나눈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도 어느날에는 소하가 자신이 사춘기가 온 것 같다며 왜이렇게 화가 나고 답답한지 모르겠다고 했다. 그리고 동민이가 침울한 표정을 한 채 앉아있는 어느 날엔 좀처럼 다가가지 않았던 내가 무슨일이냐고 묻자 울면서 아빠 사진을 보여주었다. 보통 어른들의 대화에서는 기승전결이라는 게 있다. 언제쯤 이 사람과의 대화가 시작되고, 흘러가고, 끝이날 것이라는 것쯤은 쉽게 이성적으로 파악이 가능하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았다. 어느 날엔 토끼처럼 숨어버려 얼굴을 보여주지 않고, 다른 날엔 하루종일 내 뒷꽁무늬만 졸졸 쫓아다니는 소하처럼.
몇 달이 지나자 그제야 조금씩 벌의 그림자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내가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학교를 벗어나서 살아왔던 것이었다. 꽤나 과거의 기억을 또렷하게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저 데이터로서의 기억만 가진 채 살아왔던 것이었다. 그 기억안의 부끄러움, 숨기고싶은 감정, 원초적인 감각들은 대부분 직선적이라고 믿었던 시간 아래 지워져 있었던 것이었다. 우리는 과거를 지나쳐 현재로 온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와 현재 미래가 한 군데에 공존하는 인생의 바퀴를 굴리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덕산의 아이들을 보면서 과거를 떠올리는 게 아니라 현재 관람하는 나 자신의 시간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영화를 만들어가면서 느꼈던 한가지의 난제는 벌에도 그림자가 있냐는 사소하고도 아리송한 질문을 거대한 카메라에 담을 수 있을까에 관련된 것이었다. 차라리 어른들이었으면 정중하게 부탁이라도 하면 멋쩍은 듯 교양있게 들어주기라도 할텐데 아이들에게 감독의 의도는 아직까지는 너무 어렵기만 하다. 그래서 차라리 아이들만큼 작은 카메라였다면 어땠을까 생각했는데 감독님의 의도는 큰 카메라로 찍는 것이기에 그 담담한 나무같은 카메라에 애정을 주기로 했다. 그럼에도 나는 이 감독의 목소리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신념, 종교, 철학, 가치관이 영화에 직접적으로 드러났으면 좋겠다고 느꼈다. 이해받지 못하는 영화가 될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사이자 감독인 존재만이 볼 수 있었던 아이들의 초상을 관객에게 보여주고, 들려주고, 느끼게 해줘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예은이의 묵직한 몇 마디에 심장이 내려앉았던 적이 있었다. 선생님은 자기 작업 안하고 여기 있어서 어떻게 하냐는 걱정어린 조언에 번쩍 정신이 들기도 하고, 아무래도 교실에서 조연 정도의 역할 밖에 안되는 것 같다고 하거나, 노동하는 인간에 대한 호기심이 생긴다고 하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내 나이에 하는 고민치고도 꽤나 성숙한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요즘엔 한울이에게 시선이 자주 머문다. 지금 저 아이는 선생님이 곤란한 상황인걸 알고 아이들의 여론을 바꾸기 위해 큰 소리로 좋은 말을 해주는구나, 선생님의 지갑사정이 걱정되서 볼멘 소리로 자기는 잘 도와줄테니 자기만 맛있는걸 사달라고 하는 걸 보고 나의 6학년때가 많이 생각났다. 엄마가 어느 날 겉으로만 봐도 방황하는 아이들이 집에 갈 차비가 없어서 돈을 좀 달라고 하는 부탁을 딸 생각나서. 라는 핑계로 그 친구들에게 돈을 줬다는 것이었다. 그걸 듣고 짜증이 나서 엄마에게 화를 냈던 기억이 난다. 그 돈을 차비에 썼을 리가 전혀 없다는 걸 너무 잘 알고있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똑같이 부모님이 일하느라 챙김을 못받는 아이들끼리 어울려다니며 동네 어른들에게 돈을 달라고 했던 적이 있었고, 그때마다 나는 돈을 못받았기 때문에 엄마가 다른 애들에게 그렇게 했다는 것에 괜시리 억울하고 분했다. 한울이도 자기가 도와주려는 선생님이 자꾸만 협조적이지도 않은 아이들을 따라다니고 애정을 주는 게 짜증이 났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울이 혼자 카메라 앞에서 몇시간동안 자유롭게 떠들게만 해도 영화가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기도 했다. 소하는 보고만 있어도 사랑스러워서 그냥 덕산에 도착하자마자 소하부터 찾는 게 일상이다. 소하도 그런 걸 아는 지 내가 보이면 손을 덥썩 잡거나, 나를 꽉 껴안아준다. 어느 날엔, 치킨을 너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나도 모르게 엄마처럼 미소를 지으면서 소하를 한참동안 바라봤다. 어떤 날엔 5학년 이후로 친구가 없어서 혼자있을 시간이 많아져서 그림을 그리고 놀게 되었는데 이제는 적응이 되서 괜찮다는 말을 덤덤하게 했다. 그 나이에 자신의 무리가 없다는 건 인생의 가장 큰 위기임에도 소하는 친구가 없다는 이야기를 너무나도 덤덤하게 했다. 6학년 그리고 그 피터지는 암투같은 우정을 너무나도 또렷하게 겪은 나로서는 소하의 덤덤함이 부럽기까지 했다.
같은 아파트에 살던 친구 두명과 늘 붙어다녔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전학을 와서 이미 친해진 두명과 친해졌지만 이내 또 2명이 한명을 따돌리고 그 과정을 돌려가며 반복했다. 나는 한명이 되지 않기위해 놀이터의 미끄럼틀과 정글짐에 그 당시의 한명의 욕을 지워지지않는 유성매직으로 신나게 썼던 기억이 난다. 그 신남이란 혼자가 되지 않겠다는 절규에 가까운 몸짓이었다. 결국 선생님과 부모님들이 알게되어 저녁노을이 시린 겨울날에 울며불며 잘 지워지지않는 그 낙서들을 지우며 그 친구에게 잘못했다고 빌었던 기억이 난다. 가끔은 그 시절이 너무 또렷하게 각인되어있어서 아이들을 보면 그때의 내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나도 그랬는데, 단지 내 시간이 조금 흘렀다는 이유로 지금 이 친구들에게 선생님으로 불려도 되는지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기도 한다. 게다가 나도 인간인지라 특정 아이에게 시선이 더 가는 것도 사실이다. 영화를 보는 관객도, 더군다나 감독도 그럴 것이다. 몸짓의 언어를 쓰는 남자아이들과 감당하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동민이, 실존을 고민하는 예은이, 아리송한 소하와 제하, 감독이 안쓰러운 한울이, 예리하게 교실의 사태를 비판하는 시우와 예준이, 그보다는 조금은 덜 섬세한 윤재선생님까지 관객이 시선이 가는 인물이 아마도 그 자신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감독의 이야기에 스스로 찾아가 매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는 그때에 끝이 나지만 이야기는 그때에 새롭게 시작할 것이다. 나의 기억 안에서도 수십년이 흘러도 덕산의 아이들은 영원히 같은 모습으로 기억될 것이다. 아주 우연한 기회에 성장을 마친 아이들을 보기 전까진 말이다. 그 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면서 영화의 막이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고싶다.